달과 6펜스 - 서머싯 몸

2013. 4. 10. 21:57



'고전'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검색해보면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이라고 나온다. 나에게 고전은 읽을 가치는 있으나 재미는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접한 많은 작품이 그러했다. 그런 나에게 <달과 6펜스>는 고전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최초의 작품이었다. 물론, 초반 몇 장은 지루했지만, 찰스 스트릭랜드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부턴 흥미진진했다.

폴 고갱의 삶은 서머싯 몸의 탐미주의와 만나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새로운 인물로 탄생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찰스 스트릭랜드는 증권 중개인을 하며 안정적인 삶을 살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난다. 작중 작가로 나오는 화자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사망했을 때까지의 이야기를 한 발짝 떨어진 위치에서 바라보며 독자에게 전달한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6펜스(현실)'가 아닌 '달(이상)'을 찾아 떠난 스트릭랜드의 삶, 그와는 모든 것이 반대되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줄 알았던 스트로브의 삶. 누구의 삶이 더 가치 있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순간조차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스트로보가 없었다면 천재 스트릭랜드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란 것뿐. 스트릭랜드의 예술적인 천재성이나 스트로보의 슬플 만큼 우스꽝스러움도 물론 인상적이고 좋았지만 나를 계속 책 속으로 끌어들인 건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서머싯 몸의 글 자체였다.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그의 문장은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붙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는 문장을 만나는 건 흔한 일이지만 한 권의 책에서 이렇게 자주 만나는 건 드문 일이다. 나중에는 책에 포스트잇을 붙여두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오는 페이지를 메모해가면서 읽었다.

서머싯 몸이 소설을 쓰는 목적은 재미를 위해서라고 했던데 책이 출간되고 94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재미있으니 그의 목적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딱 한 가지 별로였던 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모두 부정적으로 그렸다는 건데 해설을 읽어보니 여성 혐오증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조금 불편하긴 했다. 나에게 <달과 6펜스>는 서머싯 몸이라는 작가를 만나게 해 준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언제 사뒀는지 <인간의 굴레에서>도 책장에 있던데 나중에 읽어봐야겠다.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이다. - P.77

고통을 겪으면 인품이 고결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행복이 때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수는 있으나 고통은 대체로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뿐이다. - P.90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이 해변가 조약돌처럼 그냥 버려져 있다고 생각해? 무심한 행인이 아무 생각 없이 주워 갈 수 있도록?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 그리고 또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아냐. 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 - P.102

사랑은 몰입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잊어버린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 머리로는 알지 모르나 - 자기의 사랑이 끝날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환상임을 알지만 사랑은 환상에 구체성을 부여해 준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을 현실보다 더 사랑한다. 사랑은 사람을 실제보다 약간 더 훌륭한 존재로, 동시에 약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미 자기가 아니다.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고 하나의 사물, 말하자면 자기 자아에게는 낯선,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되고 만다. - P.159 ~ 160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사용한다. 말에 대한 감각이 없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함으로써 그 말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별것 아닌 것들을 기술하면서 온갖 것에 그 말을 갖다 쓰기 때문에 그 이름에 값하는 진정한 대상은 위엄을 상실하고 만다.
- 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