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느꼈던 먹먹함이 이 소설에서도 느껴졌다. 그 빛깔과 느낌은 서로 다르지만,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는 먹먹함만은 같았다. 처음엔 누경이 왜 기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해 답답했고 나중엔 책을 읽어 나갈수록 쌓여가는 누경의 감정들이 버거웠다. 누경과 강주. 이 둘의 사랑은 현실의 잣대로 보면 그저 불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아름다울 수 없다. 하지만 작가의 머리에서 태어나 손끝에서 피어난 그들의 사랑은 너무나 서정적이었으며 누경이 사랑을 하면서 느끼는 온갖 감정의 파편들이 내 가슴에도 콕콕 박혀 읽는 내내 먹먹했다. 서정적인 글도 글이지만 기현, 강주, 상미 각각의 인물들과 누경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도 정말 좋았다.

전경린 작가 글은 처음인데 글이 아주 마음에 든다. 빌려 읽은 책이지만 내 돈 주고 사서 읽었어도 전혀 아깝지 않았을 책이었다. 마음에 와 닿는 글귀가 많아서 나중에 소장용으로 한 권 사두려 한다. 누경과 상미의 대화 중에서 누경이 상미에게 했던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누경의 말에 의하면 나도 꽤 행복한 사람이구나 싶어서 조금은 위안이 된다.

"난 외로움을 잘 견뎌. 내가 못 견디는 건 번잡한 관계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사람도 행복하지만,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p.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