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구 - 김이환

2011. 9. 4. 14:12



편의점으로 잠시 담배를 사러 나간 사이 아버지의 전화를 받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되어 아버지와 전화로 다툰 남자는 담배 한 갑과 라이터를 들고 동네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길을 지나다 남자와 어깨를 부딪친 정체모를 할아버지는 남자에게 무언가를 조심하라는 말을 남긴다. 할아버지의 말이 계속 떠오르는 남자에게 닥친 위험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높이가 2m쯤 되고 완전히 둥글고 표면이 검은 구가 남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던 동네 아저씨가 호기심을 못 이기고 검은 구에 손을 갖다 대자 검은 구는 그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비명을 지르며 검은 구 안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갔고 그 광경을 처음부터 목격한 남자는 공포에 질려 검은 구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책의 첫머리에 쓰여 있듯이 이 소설은 검은 구를 처음 목격한 남자가 정체불명의 검은 구에게서 끝없이 도망치는 도주에 관한 기록이다. 검은 구를 처음 목격한 남자는 떨어져 사는 부모가 걱정되어 부모가 사는 곳으로 가려 하지만 그 사이 도시는 교통이 마비되고 차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검은 구는 점점 그 수가 늘어나고 검은 구에 대한 정보는 넘쳐나지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정보인지를 판단하기도 어려워진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검은 구의 등장에 혼란에 빠지고 그 혼란을 틈타 강도와 살인 등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들도 나타난다. 사람들이 절망에 대처하는 자세는 여러 가지였지만 죽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것만은 모두 같았다.

이 책처럼 어느 날 갑자기 원인 모를 이유로 사람이 죽어나가고 세상이 멸망할 위기에 처한다면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 피할 곳도 도망갈 곳도 없으니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 주인공 남자는 끝까지 도망쳐 살아남는다. 남자가 살아 남은 진짜 이유는 후반부에 나오는데 이 또한 원인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살아남은 남자는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 심판에서조차 남자는 살아남는다. 그리고 도망친다. 대체 검은 구의 정체는 무엇이며 남자는 왜 도망쳐야 하고 언제까지 도망쳐야 할까? 이 또한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소재도 독특하고 몰입도도 강한 소설이었다. 앞으로 검고 둥근 것을 보게 되면 공포를 느낄지도 모르겠다.